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인으로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하여
이이(李珥)의 학문을 발전시킨 당대의 석학이었다.
1567년(명종 2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정주교수를 거쳐, 1572년 정자·저작을
지내고 1574년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후 호조와 예조의
정랑, 통진현감, 전라도 도사, 종묘서령 등을 지내고 1582년 부모봉양을
위해 보은현감으로 나갔다. 1591년 일본 사신이 오자
옥천에서 상경, 대궐 앞에서 일본 사신의 처단을 상소하고 일본의 침략에
대비, 국방의 강화를 주장했으나 용납되지 않았다. 다음해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1천 7백여 병을 의병을 규합하여 청주를
수복했다. 이어 전라도로 향하는 왜장 고바야카의 왜군을
막기 위해 금산으로 향했으나 전공을 시기하는 관군의 방해로 대부분의
의병이 해산당하고 불과 7백 명이 의병으로 금산 전투에 참가하여 끝까지
용전하다가 7백 의병과 함께 모두 전사했다. 이이(李珥)의 문인 중 가장 뛰어난
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이(李珥)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켰다.
곽재우(郭再祐)·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 등과 함께 '임란사충신'으로
불리우고 문묘에 배향되었다. 그의 아들 조완기(趙完基)도
아버지와 함께 순절하여 정문이 세워졌다.
영의정에 추증,
문묘에 배향되었다.
옥천의 표충사, 배천의 문희서원, 금산의 성곡서원,
보은의 상현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중봉집(重峯集),
중봉동환봉사(重峯東還封事)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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