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2년(명종 7)에 진사가 되었으며, 1558년(명종
13)에 식년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호조좌랑에 기용되었다가
전적(典籍)ㆍ정언(正言)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563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외숙 이조판서 이량(李樑)의 전횡을 논할 때 교리(校理)로서
이에 참여하였다가 그 경위를 이량에게 알려준 사실이 발각되어, 울산군수로
좌천된 뒤 파면되었다.
1581년(선조 14) 영암군수로 다시 기용되고, 이어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91년 동래부사(東萊府使)로 있다가 서인(西人)이 제거될 때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광주(光州)에서 모집한 의병 6천여 명을 이끌고 금산(錦山)싸움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광주의 표충사(表忠祠),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종용사(從容祠),
순창(淳昌)의 화산서원(花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제봉집', '유서석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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