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침(守琛)의 아들이다.
17세 때 초시에 합격했으나
신병으로 복시를 못 치르자 과거를 단념하고, 백인걸(白仁傑)의
문하에서 경학
연구에 정진했다. 선조 초에 학행으로 현감, 지평 등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1580년에는 장령직을 굳이 거절하자 마교(馬轎)를
타고 상경하라는 우례까지 받았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 때는
세자의 부름으로 우참찬에 오르고, 1594년 죄참찬에 이르러 영의정 류성룡(柳成龍)과 함께 일본과의
화의를 주장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고향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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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부터 이이(李珥)와 교분이 두터웠으나
학설에 있어서는 이황(李滉)의 이기호발설을 지지하고, 시발리승 일도설을 주장하는
이이(李珥)와 사단칠정에 대한 논쟁을
벌이는 등, 이이(李珥)의 학설을 반박하여 유학계의 큰 화제가 되었다. 문하에
많은 학자가 배출되었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문묘에 배향되었다.
여산의
죽림서원(竹林書院), 창녕의 물계서원, 해주의 소현서원(紹賢書院),
함흥의 운전서원(雲田書院), 파주의 파산서원에 제향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