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색(李穡)의 문인. 1362년(공민왕
11) 문과에 급제하여 전교주부
등 여러 관직을 거쳐 예조정랑 겸 성균태상박사가 되어 전선을 관장했다.
1375년(우왕 1) 성균사예, 예문응교, 지제교 등을 역임하고, 권신
이인임(李仁任), 경복흥(慶復興) 등의 친원배명정책을 반대하다가 유배되었고, 2년 후 풀려나와
1383년 동북면 도지휘사 이성계(李成桂)의 참모가 되었으며, 이듬해
전교부령을 거쳐 성절사 정몽주(鄭夢周)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85년 성균좨주,
남양부사를 지내고 성균대사성에 승진, 1388년 위화도(威化島)의 회군(回軍)을 계기로
신진 세력이 집권하게 되자 이성계(李成桂)의 우익으로서 지공거, 지신사를 역임,
조준(趙浚)의 전제개혁안을 시행토록 건의하고, 척불을 주장하여 조민수(曺敏修)
등 구세력을 탄핵, 조선개국의 정지작업을 시작했다. 이어 밀직부사가
되었고 이듬해 이성계(李成桂)·조준(趙浚)·심덕부(沈德符) 등과 함께 창왕이 왕씨가 아니라 하여 강화에 추방, 공양왕을
추대하고 좌명공신이 되어 봉화현충의군에 봉해진 뒤 삼사우사에 올랐다.
1390년(공양왕 2) 지경연사를 지낸 뒤 성절사 겸 변무사로 명나라에
가서 이성계(李成桂)가 명나라에 침범하려고 한다는 윤이(尹彛), 이초(李初)의
무고를 밝히고 동판도평의사사사겸 성균대사성·지문하부사 겸 대사헌,
삼사부사 등을 역임했다. 이듬해 이성계(李成桂)가 군사권을 장악하여
삼군도총제부를 설치하자 우군도총제가 되었고, 이어 정당문학으로 재직중
구세력이 득세하자 삭직, 유배되었다가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된 뒤 충의군에
복직되고, 조준(趙浚), 남은(南誾) 등과 이성계(李成桂)를 추대, 조선건국 후 개국공신 1등으로 문하시랑찬성사가
되어 사은 겸 정조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1394년(태조 3) 한양천도를 주장하여
실현케 했다. 조선의 기틀을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도읍을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경복궁을 비롯한 궁전 ·궁문에서부터 도성의 8대문,
성내(城內) 48방(坊)의 이름을 짓였다. 이듬해 정총(鄭摠) 등과 "고려사(高麗史)"
37권을
찬진했고, 1397년 동북면 도선무 순찰사가 되어 성을 건축하고 역참(驛站)을
신설했으며 성균제조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에서 정조사가
올린 표문이 잘못되었다 하여 기초자를 잡아오라 하자 그는 명나라와
실력으로 항쟁할 것을 주장, 군비확보에 전력을 기울이다가 남은(南誾) 등과
이방석(芳碩)을 옹호하고 정실 소생의 왕자들을 죽이려 한다는 혐의로
이방원(芳遠, 태종)에게 처형당했다.
유학(儒學)의 대가로 조선개국
후 군사, 외교, 성리학, 역사, 행정, 저술 등 다방면에 걸쳐 초기의
건국 작업에 활약했으며, 척불숭유를 국시로 삼게 하여 유락의 발전을
기했으며 글씨에도 뛰어났다.
저서로는 삼봉집(三峰集),
경제육전(經濟六典), 경제문감(經濟文鑑), 심기이편(心氣理篇),
불씨잡변(佛氏雜辨), 심문천답(心問天答), 불씨잡변(佛氏雜辨),
심문천답(心問天答), 진법서(陳法書), 금남잡제(錦南雜題)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