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8년(태조 7) 이방원(李芳遠)의 도진무로서
이숙번(李叔蕃),
마천목(馬天牧)과 더불어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 등을 죽인 공으로 정사공신이 되고,
1400년 사병제도의 페지로
관군에 편입되었다. 1401년(태종 1) 박포(朴苞)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좌명공신에 올랐으며, 1410년 진위장군으로 북벌장수에게 위문차 파견된
바 있고, 1412년 순금사 대호군으로 충청도의 부패한 곡물을 시찰하였다.
1413년 경기, 충청의 판제용감사, 1415년 의금부진무를 거쳐, 1418년(세종 즉위)
동지총재 겸 의금부 제조로서 내시위 삼번절제사를 역임하였고, 1422년
경시서 제조가 되고 영의정부사 류정현(柳廷顯), 전판한성부사
황희(黃喜) 등과 더불어 화폐행정의
질서를 확립하였다. 이어 원주목사와 홍주목사를 거쳐 1434년 형조참판,
인순부윤, 경창부윤, 중추원사가 되었고, 1435년 정조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풍랑에 표류된 동포 78명을 구출 귀국하였다. 이해 판한성부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임. 1439년 중추원사에 재차 임명되었고,
이어
판중추원사에 이르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