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전씨족보(南陽田氏族譜)"에 의하면
시조(始祖) 전풍(豊)은 중국(中國)에서 한림학사(翰林學士)였으나
옥책(玉冊, 임금이나 왕비에게 존호를 올릴 때에 그 덕을 칭송하는
글에서 옥에 새긴 간책)을 잘못 쓴 죄로 동방(東方)으로 유배(流配)되어
고려(高麗)에 들어와 남양군(南陽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를 고증(考證)한 문헌(文獻)이 없고 정확한 근거를 찾기
못하여 재경종친회(在京宗親會 : 회장 전충호)에서 왕조실록(王朝實錄)과
국조방목(國朝榜目) 등의 여러 문헌(文獻)을 참고로 하여 20여년간 역사적인
뿌리 찾기의 끈질긴 노력 끝에 아래와 같은 새로운 사실을 밝히게 되었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왕실의 근친은 모두 주살되고 벼슬이
높은 원친은 유배 당했으며, 전국에 산거한 모든 왕씨는 '종모성'하라는
태조의 왕명에 따라 어머니 성을 따른 이가 많았고, 뜻있는 사람은
왕자가 들러간 글자인 옥(玉), 전(全), 전(田) 등으로 개성하였다. 이무렵
태종 이방원의 집 종으로 사병이 되어 제1, 2차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워 정사좌명원종공신이 되고, 사헌부에서 신분의 진위를 밝혀
천민이 아닌 양민의 자손임이 판명되어 태종으로부터 전흥이라는
성명을 하사받고 벼슬길에 나간 것이 남양전씨의 출발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결국 남양전씨는 고려의 왕족으로 공주에 유배되었던 전주가 강녕
부승을 지냇으므로 자냈으므로 본관을 남양으로 삼게 되었으며,
훗날 세종 9년에 한성부윤으로 추증되고 비석을 하사받은 전득우의
아들 전흥이 조상의 원수를 갚기 위해 바원의 집종으로 들어갔으나
결국 인간관계가 성립되어 태종에 이어 세종을 섬기며 왕권 확립과
행정 개혁에 빛나는 업적을 남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남양전씨는
중흥조 전흥의 다섯 아들 중 맏아들 가생과 둘째 조생이 한날 과거에
급제하여 장안에 화제가 되었으며, 조생의 아들 림이 크게 이름
떨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