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했다가 다시 대사헌을
거쳐 1659년 병조판서가 되어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국정에 참여하던 중 효종이
죽고, 현종이 즉위하자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예송이 일어나자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남인인 윤휴(尹鑴), 윤선도(尹善道) 등의 3년제를
반대하고 기년제를 주장하여 논란을 거듭하던 중 승리하여 우참찬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곧 사퇴했다. 뒤에 좌참찬 겸 쇄주 찬선에
이르렀다.
성리학자로서 특히 예학에 밝았고, 이이(李珥)의 학설을 지지했다.
문묘를 비롯하여 공주의 충현서원, 옥천의 표충사, 회덕의 숭현서원
등에 제향,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동춘당집(東春堂集)",
"어록해(語錄解)"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