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갑조의 아들이다.
1633년(인조 11) 생원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천거로 경릉참봉이 되었다. 그 후 왕자사부 용담현령 지평
등을 거쳐 효종 초에 집의에 올랐으나 당시 청서파에 속했던 그는 공서파인
김자점이 영의정으로 발탁되자 사직하고 낙향했다. 그 후 충주목사
부호군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후진 양성에 전력했다.
1658년(효종 9) 찬선에 등용되고 이조판서에 승진하여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했으나 효종이 죽자 북벌계획이 중지되었다. 이 때 효종의 장례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제기되자, 삼년설을 주장하는 남인에 대하여
기년설을 건의하여 이를 채택케 함으로써 남인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
판중추부사 좌참찬 등을 역임하는 동안 서인의 지도자로서 활약했다.
1668년(현종 9) 우의정이 되었으나 사직했다가 1671년 다시 우의정에
기용되고, 다음해 좌의정이 되었다. 그 후 남인이 득세하자 자의대비
복상문제 때 기년설을 채택한 죄로 여러 곳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중
1680(숙종 6) 경신대출적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영중추부사로 기용되었으며,
1683년에 벼슬을 사양하고 봉조하가 되었다. 이 무렵 남인에 대한
처벌문제가 논의될 때 과격한 방법으로 숙청을 도모한 관계로 악화되어
마침내 윤증과의 감정대립이 악화되어 마침내 윤증(尹拯) 등 서인의
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소론과 그를 영수로 한 노장파의 노론으로 분파되었다.
그 후 정계에서 은퇴하고 청주 화양동에 은거, 1689년 왕세자(경종)가
책봉되자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했다가 제주에 안치되고, 이어 국문을
받기 위해 상경 도중 남인의 책동이로 사사되었다.
일생을 주자학
연구에 몰두한 거유로서 이이(李珥)의 학통을 계송하여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고, 예론에도 밝았다.
성격이 과격하여 많은 정적을 가졌으나
뛰어난 학식으로 많은 학자를 길러냈다. 문묘 효종묘의 배향을 비롯하여
청주의 화양서원, 공주의 충현서원 등 전국 30여 개의 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송자대전(宋子大全), 우암집(尤庵集), 주자대전차의(朱者大全箚疑), 이정서분류(二程書分類),
주자어류소분(朱者語類小分), 논맹문의통고(論孟問義通攷), 심경석의(心經釋義), 사계선생행장(沙季先生行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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