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2년(광해 4) 진사가 되고, 1616년 성균관의
유생으로서 권신 이이첨(李爾瞻) 일당의 횡포를 상소했다가 이듬해 경원에
유배, 이어 기장으로 유배되는 등 장기간 유배생활을 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의금부 도사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해남으로
낙향했다. 1628년 별시문과 초시에 장원, 왕자사부가 되어 봉림대군을
보도하고, 그 뒤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왕을 호종하지
않았다하여 유배, 이듬해 풀려나 다시 왕의 부름으로 사예를 거쳐 예조참의에
이르렀으나 서인의 중상으로 사직하고 은퇴, 1657년 다시 기용되어 첨지중추부사에
오르고, 이듬해 동부승지로서 송시열(宋時烈) 등과 논쟁하다가
3사의 탄핵으로 삭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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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의 거두로서 1659년 효종의 장지문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서인과 맞서 싸우다가 패배하여 다시 유배, 이어 위리안치,
1667년 방환되었다. 치열한 당쟁 속에서 일생을 거의 벽지의 배소에서
보내며 작품 활동을 계속, 그 동안의 작품은 '고산유고(孤山遺稿)'에
수록되어 있다. 그의 시조는 정철(鄭澈)의 가사와 더불어 조선시가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
1675년 남인의 집권으로 신원되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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