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학과 행의로 천거되어 효종 때 자의, 주부,
공조좌랑, 현종 때 진선, 지평, 장령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학문 연구에 전심했다. 앞서 1660년(현종 1) 복상문제로 제1차 예송이
일어나자 남인으로 서인의 기년설에 대하여 3년설을 주장했으나 패하고
사문난적으로 몰렸다. 1674년 제2차 예송으로 서인이 물러나고
남인정권이
수립되자 성균사업에 기용되고, 동부승지, 이조참의, 한성우윤, 대사헌,
우참찬, 이조판서 , 도총관, 공조판서 등을 지내고, 1679년(숙종 5)
우찬성에 승진, 당시 송시열(宋時烈)의 처벌문제로 남인이 강온 양파로 분열되자 청남으로 송시열의
엄벌을 주장했다가 다음해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할 때 갑산에
유배, 이어 허견(許堅)의 옥사에 관련된 혐의로 사사되었다.
그의
학문은 종래 금과옥조로 신봉된 주자의 해석방법을 배격하고, '중용(中庸)',
'대학(大學)', '효경(孝經)' 등 경전에 독자적인 해석을
가하여 장구와 주를 수정함으로써 당시 학계에 큰 파문을 던졌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