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趙光祖)의 문인.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스승 조광조(趙光祖)가 처형되고 많은 선비들
이화를 입자 벼슬길을 포기하고 "대학(大學)", "논어(論語)"를 읽고 "태극도(太極圖)"를 그리면서
조화(造化)의 근본 탐구에 몰두했다. 후에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처가가 있는 파주(坡州)의 우계(牛溪)에 은거했다.
1552년(명종 7) 예산현감(禮山縣監)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 다시 여러 고을의 현감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사퇴했다. 글씨를 잘 써서 명성을 떨치고 문하에서 많은 석학(碩學)들을 배출했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파주 파산서원(坡山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청송집(聽松集)"이 있고
글씨에 "방참판유령묘갈(方參判有寧墓碣)"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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