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趙光祖)의
제자이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스승과 동지를
잃고 금강산에 입산했다. 그 후 돌아와 1537년 식년문광 병과로
급제하고, 성균관에 오래 머무르다가 검열 남평(南平)현감 호조정랑
지평 등을 역임했다.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소윤(小尹)에 의해 파직되고 1947년 양재역(良才驛) 벽서(壁書) 사건에
연루되어 안변(安邊)에 유배되었다. 1551년 풀려나와 오랫동안 고향에
은거하다가 소윤의 거두 윤원형(尹元衡)이 죽자 복직하고, 1567년 71세의
나이로 교리(校理)가 되고, 선조 때 직제학 이조참판 대사간 대사헌
공조참판,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등을
역임했다. 1578년(선조 11) 우참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으며 이듬해 동서분당(東西分黨)의 폐단을 지적하고 군비확장을
강조하였다.
선조 때 청백리(淸白吏)로 뽑혀 기록되었으며
학문에도 뛰어났다.
남평의 봉산서원(蓬山書院), 파주(坡州)의 파산서원(坡山書院)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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