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조천혁(天赫)은 중국 송(宋)나라 태조의 손자
조유길(惟吉)의 다섯째 아들이다. 그는 979년(고려 경종 4, 송
태종 4) 위왕이 화를 입자 숙부 유고(惟固)와 함께 화를 피해 우리나라에
들어와 지금의 부여군 임천면에 정착하였다. 그 후 고려 현종 때
강감찬(姜邯贊)과 함께 거란군을 대파한 공으로 가림백(嘉林伯, 임천의 옛이름)에
봉해지고, 문하시중 평장사에 이르렀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임천(林川)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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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표적 인물(代表的人物) ]
조응공(應恭) : 조선 중종 때 황해도사 겸 춘추관기사관을 지냄.
조원경(元卿) : 성균관사성을 지냄
조명정(明鼎) : 우승지·충청도관찰사·이조판서를 지냄
조병호(秉鎬) : 조선 말기 문신
조지서(之瑞) : 성종 때 청백리.
조원(瑗) : 시문(詩文), 선조 때 정언(正言)이 되어 당쟁의 폐해를 상소하였으며, 뒤에는 승지에 이르렀다
조희일(希逸) : 예조참판 등을 역임하였으며 서화, 시문(詩文)에 능하였다
조석형(錫馨) : 시문(詩文), 인조 때 진사시(進士試)에 1등으로 합격하였으나
일체의 벼슬을 거부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며, 특히 당시(唐詩)에 정통하였다.
이성기(聖期) : 한문소설 "창선감의록(彰善感義錄)"의 저자로 알려졌다.
조경호(慶鎬) : 흥선대원군의 사위로서 공조 ·예조판서를 역임하고 일본정부가 준 남작(男爵)을 거절하였다. 임천조씨는 조선조에서 상신 1명, 호당 1명,
청백리 1명, 문과 급제자 38명을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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