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의겸(沈義謙)·홍인경(洪仁慶)을 섬긴 것이 인연이 되어 박순(朴淳)에게서 10여년간 수학했으며,
풍수설을 배우고 역학·율려에도 정통하였다. 선조 때 천거로
임관되어 교정청의 낭관·영릉참봉을 거쳐 육품에 올랐다. 스승
박순이 서인으로 영의정에서 파직되자 화를 입을까 두려워 동인인
정여립(鄭汝立)·이발(李潑) 등과 친교를 맺었다.
1574년(선조 7) 이산해(李山海)의 추천으로 곡성현감이 되었으나 스승을 배반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 후 '절의청담변(節義淸談辨)'을 지어 자기
처지를 변명했으나 많은 학자들로부터 배절의론이라는 비난을 받다가
정여립(鄭汝立) 일파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정여립(鄭汝立)과
교분이 두터웠다는 이유로 경원에 유배 도중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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