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사를 거쳐 1561년(명종 16) 문과에 급제하여 응교에
올라 사가독서를 했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이조좌랑을 비롯하여
형조판서에 승진하고 이어 이조판서·대사성을 지낸다. 1578년(선조
11) 대사간에 이르러 서인(西人) 윤두수(尹斗壽) ·윤근수(尹根壽) 등의
죄를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1590년 영의정에 올라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광국(光國)공신에 책록되었고 이듬해 정철이
건저문제(建儲問題)를 일으키자 아들 경전(慶全)으로 하여금 정철(鄭澈)을
탄핵하게 하여 유배시켰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사(兩司)로부터 국정(國政)을 그르치고 왜적(倭敵)을 들어오게 하였다는
죄목으로 탄핵을 받아 파직, 백의(白衣)로 평양에서 다시 탄핵을 받아
강원도에 귀양갔다가 돈령부영사(敦寧府領事)로 복관되고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1600년 영의정에 재임(再任),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에
봉해졌다.
6세 때 글씨를 잘 써서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고 서화(書畵)에
능하여 대자(大字)와 산수묵도(山水墨圖)에 뛰어났다.
선조 때 문장
8가(文章八家)라 일컬었다. 조정에서는 동인(東人)에
속하였으나 다시 북인(北人)에 속하였다가 마지막에는 대북(大北)의
영수가 되었다.
저서로 '아계유고(鵝溪遺稿)'가
있고, 글씨에 '조정암광조묘비(趙靜庵光祖墓碑)'(용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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