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4년(인조 12) 별시문과에 장원하고, 전적
좌랑 사서 등을 거쳐 1635년 정언. 지평, 다음해 수찬을 거쳐 부교리가
되었다. 이때 후금의 위협으로 사신을 교환하게 되자 이에 적극
반대, 상소를하여 주화파의 최명길(崔鳴吉)을 탄핵하고, 이
해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들어가 화의를 적극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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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가 청군에 항복한 뒤 적진에 송치되어 적장 용골대(龍骨大)의
심문에 굽히지 않자 심양으로 이송, 그곳에서도 끝내 굽히지 않아 윤집(尹集) 홍익한(洪翼漢)과 함께 살해되었다.
저서에 '충렬공유고(忠烈公遺稿)'가 전해 온다. 윤집(尹集)
홍익한(洪翼漢)과 함께 추앙을 받은 병자호란의 삼학사로 일컬어진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광주의 현절사(顯節祠), 평택의 포의사(褒義祠), 홍산의
창렬서원(彰烈書院), 영천의 장암서원(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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