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 홍이성의 아들이다.
1615년(광해 7) 생원시에
합격하고 1624년(인조 2) 공주행재 정시문과에 장원, 사서가 되었고,
1635년에 장령이 되었다. 1636년 청나라 사신이 와서 굴욕적인 요청을
하므로 사신을 죽이자고 상소하였다. 또한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최명길(崔鳴吉)
등이 화친을 주장하므로
극력 반대하다가 평양서윤으로 좌천되었다. 그후 척화신으로 몰려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와 함께 심양에 압송되어 1637년(인조 15) 3월 15일에 순절하였다.
1653년(효종 4)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1686년(숙종 12) 에 이조판서에
가증되고,정려를 명했으며, 1757년(영조 33)에 의리장과 부조묘를 명했으며,
청나라 태종은 그 충렬에 감복하여 삼한태두라는 비석을 건립하였다.
광주의 현절사, 강화의 충렬사, 평택의 포의사, 홍산의 창렬서원, 부안의
도동서원, 영천의 장암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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