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차례 과거에 실패하고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업했는데
선생이 장차 간성의 재목이 될 것이라고 칭찬했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민생이 도탄에 빠지자 비분강개하여 의병을 이끌고 충주의 남창에
진을 쳤는데 모친상의 부음을 듣고 돌아왔다. 장례를 치르고 괴산의
전유형(全有亨)이 창의하면서 그를 선봉으로 삼으려 한다는 전갈을 받고
달려가 여러 곳에서 크게 군공을 세웠다. 난이 끝난 후에 군공으로
선전관에 제수되고, 훈련원 주부를 거쳐 선략장군 훈련원 판관·훈련원
첨정 등을 역임했다. 1602년 도총부 도사에 승진되고, 그 해 가을
도총부 전적이 되었다. 이듬해 무과에 급제, 비변랑이 되고 이듬해
해주판관으로 공적을 쌓았으므로 주민이 송덕비를 세웠다. 1606년
훈련원 판사 겸 사복시 내승이 되고, 1608년 덕천군수로 전임되었다.
1611년 사복시 판사를 지내고, 1614년 가산군수를 지낸 후 관직에서
물러났다. 1624년(인조 2) 홍주영장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1635년 만 80세에 우로지전을 받아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겸 충장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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