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보로 정포만호가 되고, 1598년(선조 31) 서로 양선압운관으로
미곡 23만석을 무사히 운반하여 표리를 하사받았다. 1602년 별시문과에
급제, 정자, 겸열을 거쳐 광해군 때 병조좌랑, 수찬, 응천현감 등을
지내고 은퇴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다시 기용되어 사가독서를
한 뒤 사인, 응교, 직제학, 동부승지를 지냈다. 그 후 부호군, 형조참의,
이조와 예조의 판서, 대사헌 등을 지내고, 1648년 우참찬에 승진, 다음해
효종이 즉위하자 우의정이 되고, 인조의 행장찬집청 찬집관을 겸한 뒤
좌의정에 올랐다. 이해 이이(李珥),
성혼(成渾)의 문묘종사를 상소했다가
허락되지 않자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학문 연구에 전심했다.
성리학의
대가로서 예학에 밝았으며 음률, 병법, 복서에 능했다. 문장에도
뛰어났다. 개성의 숭양서원, 광주의 명고서원, 신창의 도산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포저집(浦渚集), 경서천설(經書淺說)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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