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형 연경(延慶)의 밑에서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1531년(중종 26) 식년문과에 급제, 부수찬(副修撰)에 등용되었다가,
1533년
사경(司經)으로서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피죄인의 무죄를 논했다가 김안로(金安老) 등의 미움을 사서
파직되었다. 1537년 김안로가 사사된 뒤 다시 기용되었다.
이어 승지 등을 거쳐 세자시강원필선, 직제학(直提學), 부제학(副提學),
대사성 등을 역임.
1543년 문신정시에 장원, 한성부 우윤에 오르고 대사성을
지냈다. 그 후 형조참판, 평안도 관찰사, 병조판서,
한성부 판윤을 거쳐 1550년(명종 5) 대사헌이 되었다. 앞서
병조판서 때 이기가 뇌물을 받고 구관자의 이름을 적어 보내어 등용을
청했으나 이를 거절했던 일로 그 일당인 이중강(李重疆)의 탄핵을 받아
윤임(尹任) 일파로 몰려 보은에 유배되었다. 다음해
이기가 파직되자 석방되어 지중추부사(中樞府知事)가 되었고 1553년 함경도 지방에
야인들이 침입하자 함경도 순변사가 되어 그들을 초유했다. 1555년
호남지방에 왜구가 침입하자 전라도 관찰사로 출정, 이를 격퇴하고 돌아와
우찬성 겸 병조판서가 되고 1558년 우의정, 1560년 좌의정,
1565년 영의정에
올랐다. 1567년 명종이 죽자 교지를 받들어 선조를
영립하고 원상으로 국사를 다스리며 신진사류와 기성사림 사이의 알력을
조정하려다가 신진사류의 정적이 되어 기대승(奇大升) 등의 공격을 받았다.
1571년 영의정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中樞府領事)가 되었다. 죽을
때 붕당(朋黨)이 있을 것이라는 내용의 유소(遺疏)를 올려 이이(李珥)와 3사의 규탄을 받았으나
뒤에 동서분당(東西分黨)이 일어나 그의 예언이 적중했다.
선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고, 충청도 청안(淸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 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동고유고(東皐遺稿)", "조선풍속(朝鮮風俗)"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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