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9년(명종 4)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58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사관(史官)이 되었다가 1563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그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1570년(선조 3) 대사성, 이듬해 부제학,
1572년
대사간으로 있다가 병으로 그만두었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특출하여
32세에 이황(李滉)의 제자가 되면서부터 선학(先學)들이 미처 생각지 못한
새로운 학설을 제시한바가 많았다. 그 중에서 이황과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논란한 편지는 가장 유명하다. 이 '사칠이기론(四七理氣論)'의
변론이 있은 후 이황은 그의 학식을 존중했다. 서예에도 능했다.
사후 1590년(선조 23)에는 생전에 종계변무의 주문을 쓴 공으로 광국공신3등(光國功臣三等)에 추록, 덕원군(德原君)에 추봉,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광주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고봉집(高峰集), 논사록(論思錄),
주자문록(朱子文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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