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부원군 이석형(李石亨)의 현손이다.
1585년(선조 18) 진사가 되고 1590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등용되었다가 1592년 임진왜란 때 행재소에 가서 설서가 되었다.
다음해 명나라 경략 송응창(宋應昌)의 요청으로 황신(黃愼)
등과 함께 뽑혀서 '경서(經書)'를 강의하여 학자로서 존경을 받았다.
그 후 이조, 예조, 병조의 정랑, 집의, 승지를 역임하고
병조참지가 되어 승문원 부제조를 겸했다. 1598년 명나라
병부주사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에서 왜병을 끌어들여 중국을 침범하려한다고
자기 나라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조선국 변무주문을 지어 진주부사로
명나라에 가서 정응태(丁應泰)의 무고임을 밝혀 파직시켰다. 귀국
후 대제학에 올랐다가 1604년 세자 책봉 주청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후 자주관반이 되어 중국 사신을 접대하고 명나라에 갔을 때는 그곳
문사들의 청에 의해 1백여 장의 기행문을 모은 '조천기행록(朝天紀行錄)'을
간행했다. 1608년 광해군의 즉위 후 병조, 예조의
판서를 역임, 1613년(광해 5) 계축옥사 때 모함을 받고 사직,
1615년
형조판서로 기용되고 그 후 여러 차례 사신이 되어 명나라에 왕래했다.
1623년(인조 1) 예조판서가 되고 다음해 이괄(李适)의
난에 왕을 공주에 호종, 1627년 정묘호란 때도 병조판서로 왕을 호종,
강화에 피난하여 화의를 반대했다. 1628년 좌의정에
올랐다.
한문학의 대가로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신흠(申欽), 장유(張維), 이식(李植)과 함께
조선 중기의 4대 한문장가로 일컬어 진다.
저서로는 '월사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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