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사 신승서의 아들이다.
1586년(선조 1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학유, 감찰, 병조좌랑 등을 역임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양재도
찰방을 거쳐 그 후 지평, 사성, 대사간, 부제학, 도승지, 병조판서를
지냈으며, 1608년(광해 즉위) 대사헌으로 세자책봉주청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선조로부터 영창대군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의 한
사람이므로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파직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이조판서가 되어 대제학을 겸했으며, 노서의 중진으로 우의정을
거쳐 1627년(인조 5) 좌의정이 되었고, 이 해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세자를
모시고 전주로 피난하다가 돌아와서 영의정에 올랐다.
정주학자로
문명이 높았고, 이정구(李廷龜), 장유(張維), 이식(李植)과 함께 한문학의 조선 중기 태두로 일컬어진다.
인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상촌집(象村集), 야언구정록(野言求正錄), 춘성록(春城錄), 청창연담(晴窓軟談), 정왜잡지(征倭雜志),
산중독언(山中獨言), 이목소급(耳目所及), 공여잡재(公餘雜載), 승국유사(勝國遺事), 선천관규(先天管窺)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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