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랑 황대수의 아들이며 이이(李珥)의 문인이다.
1588년(선조 21) 알성문과에 장원, 여러 관직을 거쳐
1589년
정언으로서 정여립(鄭汝立)의 옥사에 관해 대신들의 직언하지 않음을
논박하다가 고산현감으로 좌천되었다. 1591년 전저의
문제에 관련, 파직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기용, 지평으로 명나라 송경략을 접반하고 세자(광해군)를 따라 남하
제찰사의 종사관을 지냈다. 1596년 절충장군으로서
적영에 다녀온 뒤 통신사가 되어 명사를 따라 일본에 왕래, 화의가 결렬된
뒤 조정으로 하여금 명나라의 내원을 청하게 하여 가선대부에 올랐고,
그 뒤에 위유사·찬획사·전라도 관찰사 등으로 왜란에 공이 많아
1597년
동지중추부사가 되었고, 이듬해 공조·호조의 참판, 이어 한성부 우윤·대사간을
역임했다. 1601년 대사헌으로 문경호(文景虎)에게 지탄
받는
스승 성혼(成渾)을 변호하다가 파면되었다. 1602년
사신으로 명나라에 간 사이에 또 앞서의 사건으로 대사헌 정인홍(鄭仁弘)에게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 임진왜란 때의 공훈으로 복관이
결정되었으나 상신 류영경(柳永慶)이 시행하지 않아 낙향했다. 1610년(광해군
2)
호조참판으로 진주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공조판서를 거쳐 호조판서를
지내고, 임진왜란 때 광해군을 시종한 공으로 위성공신 2 등에 회원부원군에
봉해졌다. 1613년 계축옥사에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를
받은 죄수 정협(鄭浹)의 무고로 웅진에 유배되어 배소에서 죽었다.
인조초에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공주의 창강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추포집(秋浦集)", "일본왕환일기(日本往還日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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