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
황씨 (昌原 黃氏) |
시조(始祖) : 황석기(黃石奇) 황충준(黃忠俊) 황양충(黃亮沖) |
창원황씨는 본관을 같이 하면서도 각각 선조를
달리하는 8파가 있는데, 이들 8파 사이의 상호관계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밝혀진 것이 없으며, 족보도 각기 따로따로 편찬한다.
시중공(侍中公)파 : 황신. 토황(土黃)으로도 불리운다.
공희공(恭僖公)파 : 황석기(石奇, 회산군). 당황(唐黃)으로도 불리운다.
호장공(戶長公)파 : 황량충. 예빈동정공파 : 황성찬. 전서공파
: 황윤기. 호장공파 : 황우용. 규정공파
시중공파의 시조 황신(信)의 원조는 고려 때 문하시중을
지낸 황충준(忠俊)이며 그후의 세계는 알수가 없으나, 창원황씨가 확실하다고
한다.
공희공파의 파조 황석기(石奇)는 원래 고려 공민왕
때의 중서문하 평장사이었다. 종래에는 그가 원나라 사람으로 고려 공민왕
때 노국공주를 수행하여 고려에 온 것으로 전해졌으나, 이미 이전에
그는 고려에서 여러 벼슬을 지내고 1339년에 '조적의 난'을 평정하는
등 활약한 사실이 '고려사'에 뚜렷이 기록되어 있다. 1348년 고려
제29대 충목왕이 죽자 황석기는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원나라에 가서
30대 충정왕의 승습(承襲)을 청하게 되었는데, 그 이듬해에 앞서 원나라에
와 있던 공민왕(江陵大君)이 원나라 위왕(衛王)의 딸 노국공주와 결혼하여
귀국하게 되자 황석기는 그때 따라 왔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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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파(分派), 계파(系派) ] 시중공파(侍中公派),
호장공파(恭僖公派), 공희공파(戶長公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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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표적 인물(代表的人物) ] [ 시중공파 ] ·황자(梓) : 부제학, 대사헌을
역임하고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기행문 '갑인연행록'과 '경오연행록'을
편술하였다. ·황인검(仁儉) : 황자의 큰아들. 형조판서를 지냈다.
·황인점(仁點) : 황자의 둘째 아들. 영조의 딸 화유옹주와 결혼, 정조
때에는 동지 겸 사은사가 되어 일곱 차례 청나라에 다녀왔다.
[ 호장공파 ] ·황사우(士祐) : 호조, 예조,
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을 역임하였다.
·황응규(應奎) : 황사우의 아들.
이퇴계의 문하생으로 임진왜란 때 절충장군에 오르고 돈녕부지사를 지냈다.
·황섬(暹) : 황사우의 손자. 부제학, 대사헌이 되었으나, 계축옥사(1613)
이후 낙향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소북파의 영수로 영의정을 지낸
유영경(柳永慶)의 처남이다.
[ 공희공파 ]
·황상(裳) : 황석기의 아들. 문하찬성사·서강도원수
등을 지냈다. ·황형(衡) : 황상의 6세손. 공조판서를 지냈다.
·황기(琦) : 황형의 아들. 직제학·대사간을 거쳐 도승지, 경기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황신(愼) : 황형의 증손. 이율곡(李栗谷)의
문하생으로 정여립의 옥사(1589) 때 정언(正言)으로서 대신들이 서로
직언을 회피한 사실을 논박하다가 좌천되기도 하였으나, 후에 공조,
호조판서를 지냈다.
이 밖에 창원황씨의 인물로는 ·황구하(龜河)
: 영조 때 노론의 중진으로 이조판서를 지냈다. ·황사영(嗣永)
: 신유박해 때 순교한 백서(帛書)사건의 주인공이다. ·황기천(基天)
: 순조 때의 명문장이며 명필이다. ·황재영(在英) : 고종 때의
학자이다. ·황필수(必秀) : 명의(名醫)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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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계 세계도(上系世系圖) ]
시중공파(侍中公派)
- 황석기(黃石奇) 호장공파(恭僖公派) -
황충준(黃忠俊)
공희공파(戶長公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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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성촌(集姓村) ]
경기도 강화군 하점면 일원 경남 함안군 칠원면 유원리
평남 강동군 고천면 구암리 일원 전남 영광군 감산면 월흥리 황해도 신천군 궁흥면 마궁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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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관지 연혁(本貫地沿革) ] 경남
창원(昌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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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렬표(行列表) ] ·시중공파
17세 |
18세 |
19세 |
20세 |
21세 |
22세 |
종(鍾) |
연(淵) |
수(秀) |
환(煥) |
규(奎) |
진(鎭) |
·공희공파
22세 |
23세 |
24세 |
25세 |
26세 |
27세 |
28세 |
29세 |
30세 |
31세 |
인(寅) |
환(煥) |
교(敎) |
진(鎭) |
순(淳) |
근(根) |
사(思) |
규(珪) |
호(鎬) |
철(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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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구(人口) ] 220,810명. (1985년) 252,814명. (2000년 통계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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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중공파 ·호장공파 ·공희공파 등
3파에서 고루 인물을 배출하였다. 시중공파에서는
자(梓) ·인검(仁儉) ·인점(仁點) 3부자가 유명하다. 자는
부제학 ·대사헌을 역임하고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기행문 "갑인연행록"과
"경오연행록"을 편술하였다. 큰아들 인검은 형조판서를
지냈고, 둘째아들 인점은 영조의 딸 화유옹주와 결혼, 정조 때에는 동지
겸 사은사가 되어 일곱 차례 청나라에 다녀왔다. 호장공파에서는
사우(士祐) ·응규(應奎) ·섬(暹)의 3대가 두드러진다. 사우는
호조 ·예조 ·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을 역임하였으며, 아들 응규는
이퇴계의 문하생으로 임진왜란 때 절충장군에 오르고 돈녕부지사를 지냈다.
손자 섬은 소북파의 영수로 영의정을 지낸 유영경(柳永慶)의 처남으로
부제학 ·대사헌이 되었으나, 계축옥사(1613) 이후 낙향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공희공파에서는 파조(派祖)인 석기의
아들 상(裳)이 문하찬성사 ·서강도원수 등을 지냈고, 상의 현손 형(衡)은
공조판서를, 그의 아들 기(琦)는 직제학 ·대사간을 거쳐 도승지 ·경기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형의 증손 신(愼)은 이율곡(李栗谷)의
문하생으로 정여립의 옥사(1589) 때 정언(正言)으로서 대신들이 서로
직언(直言)을 회피한 사실을 논박하다가 좌천되기도 하였으나, 후에
공조 ·호조판서를 지냈다. 이 밖에 창원황씨의 인물로는
영조 때 노론의 중진으로 이조판서를 지낸 구하(龜河), 신유박해 때
순교한 백서(帛書)사건의 주인공 사영(嗣永), 순조 때의 명문장 ·명필
기천(基天), 고종 때의 학자 재영(在英)과 명의(名醫) 필수(必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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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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