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문관제학 한상질(尙質)의 손자로, 한기(起)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예문관대제학 이적(李逖)의 딸이다. 두 딸은 장순왕후(章順王后,
睿宗妃)와 공혜왕후(恭惠王后, 成宗妃)이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불우한 소년시절을 보냈다. 글을 읽어서 성취한 바 있었으나 과거에는 늘 실패하였다.
1452년(문종 2) 문음으로
경덕궁직(敬德宮直)이 되었고, 이어 어린 단종이 즉위하여 김종서(金宗瑞) 등 대신이 집권하자, 친구인 교리(校理) 권람(權擥)의 주선으로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접근, 무사 홍달손(洪達孫) 등 30여명을 추천하여 그의 심복을 삼게 하였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심복 참모로서 대공을 세워 군기녹사(軍器錄事)가 되고 정난공신 1등으로 사복시소윤(司僕寺少尹)에 올랐다.
이듬해
동부승지가 되고,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좌부승지에 승진되고, 그해 가을 좌익공신(佐翼功臣) 1등으로 우승지가 되었다.
1456년(세조
2)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을 좌절시키는 데 중요한 구실을 수행하고, 그들의 주살(誅殺)에 적극 협조함으로써 좌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승진하고 1457년 이조판서에 올라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으며, 이어 병조판서가 되었다.
1459년 황해·평안·함길·강원 4도의
체찰사(體察使)를 지내고 1461년 상당부원군에 진봉되었으며, 이듬해 우의정에 이어,
1463년 좌의정을 거쳐 1466년 영의정이 되었다.
권람(權擥)·신숙주(申叔舟) 등과 인척관계를 맺고 세조 치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1466년 이시애(李施愛)가 함경도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신숙주와
함께 반역을 꾀하였다는 혐의로 피체, 신문을 당하였으나 혐의가 없어 곧 석방되었다.
1468년 세조가 죽자 세조의 유교(遺敎)에 따라
원상(院相)으로서 서정(庶政)을 결재하였다. 같은해 남이(南怡)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 1등에 책록되고,
1469년(예종 1) 다시 영의정에 복직되었으며, 이해에 예종이 죽고 성종이 즉위하자 병조판서를 겸임하였다.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에 책록되고 그해 영춘추관사로서 최항(崔恒)·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세조실록"을 완성하였으며, 성종에게 학문을 진흥시킬
방안을 제시하였고, 서적이 부족한 성균관의 장서확충을 위하여 경사(經史)관계의 서적을 많이 인출하여 비치하게 하였다.
1484년 70세로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세조 즉위 이래 성종조까지 고관요직을 역임, 군국대사에 많이 참여하였는데, 세조는 특히 그를 총애하여 “나의
장량(張良)”이라고까지 하였다. 4차의 1등 공신으로 많은 토지와 노비를 상으로 받아 호부(豪富)를 누렸다.
세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1504년(연산 10)의 갑자사화 때 연산군의 생모 윤비(尹妃) 폐사(廢死)에 관련하였다 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가 뒤에 신원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