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9년(세종 21) 친시문과에 급제하고, 전농시직장을
거쳐 1441년 집현전 부수찬이 되었다. 1443년 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가서 시로써 이름을 떨치고 귀국 도중 대마도에 들려 계해조약을
체결했다. 그 후 여러 번 세종의 명으로 성삼문(成三問)과 함께 요동에
귀양 와 있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黃瓚)을 찾아가 음운에 관한 지식을
듣고 와서 세종을 도와 성삼문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가장 큰 공을
세웠다. 1447년 문과중시에 급제하고, 응교에 이어 장령, 집의,
부제학을 역임하고, 1453년 2등이 되었다. 1454년(단종
2) 도승지에
올라 세조가 즉위하자 그를 적극 보좌하여 좌익공신 1등에 예문관 대제학이
되어 고령군(高靈君)에 봉해졌고, 이해 주문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다음해
병조판서ㆍ판중추원사 겸 판병조사, 우찬성, 대사성 등을 역임했다.
성삼문(成三問) 등의 단종 복위 계획이 발각되어 옥사가 일어나자
1457년(세조
3) 좌찬성이 되었다. 다음해 우의정에 올라 고려부원군에 진봉되고,
1459년 좌의정을 거쳐 1462년 영의정이 되었다. 예종이 즉위하자
원상이 되었고, 이해 남이(南怡)를 숙청한 공으로 익대공신 1등이 되었으며
1471년(성종 2)
성종을 잘 보좌한 공으로 다시 좌리공신 1 등에 책록되었다.
성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뛰어난
학식과 문제로써 6대왕을 섬기면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동국정운(東國正韻)' 등 많은 책을 수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