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2년(고종 9)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 전적을 거쳐
1874년(고종 11) 고리,정언을
역임했다. 당시 사대주의적 수구파가 청나라의 후원을 믿고 위세를
떨쳐 국사가 나날이 그릇되어감을 보고 유홍기(劉鴻基)·오경석(吳慶錫)·박규수(朴珪壽)·이동인(李東仁)등
에게 신문학을
배웠다. 1881년(고종 18) 일본의 선진 문물을 돌아보고 귀국, 이듬해 수신사
박영효(朴泳孝)
일행의 고문으로 다시 도일, 일본에서 17만원의 차관을 얻고
1883년에 돌아왔다. 참의교섭 통상사무에 이어 수구파의 압력으로,
동남제도 개척사 겸 관포경사로 밀려났다가 이조참의ㆍ호조참판을 지냈다.
서재필(徐載弼)
등 청년들을 일본에 유학시키고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홍영식(洪英植)과
함께 박규수(朴珪壽) 집에 모여 교유하며 국가의 개화를 위한 방안을
토의하다가, 고종 21년 도일하여 군인양성을 위해 일본에 3백만원의
차관을 교섭했으나 실패했다. 1894년(고종 31)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으나 자객 홍종우(洪鍾宇)에게 피살되었다. 그의 유해는 청나라 정부의 조처로 조선 정부에 인계되었다.
그 뒤 갑오개혁으로 개화당 내각이 조직된 1895년(고종 32)에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과 법무대신 서광범(徐光範)의 상소로 반역죄가
사면되었으며, 1910년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김옥균은 개화파의 급진적인 지도자로 문벌폐지·인민평등 등 근대사상과 근대국가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근대화의 선구자로 볼 수 있다.
저서로는 기화근사(箕和近事),
치도약론(治道略論), 갑신일록(甲申日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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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청나라를 배경으로 한 민씨 일파의 세도정치가
수구적인 데 불만을 품고, 국제 정세와 보조를 맞추기 위하여 수구파를
제거하고 국가를 개화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어 개화당 정치인들을
규합하여 신축되는 우정국 낙성연을 계기로 제거할 것을 계획하고 비밀히
고종에게 개혁안을 상주하여 신임을 얻었다. 이 해 일본 공사 다께조에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약속받고 이를 배경으로, 우정국 낙성연에서 한규직(韓圭稷)
등 수구파들을 제거하고 정변을 일으켰다. 이튿날 조직된 새 내각에
호조참판으로 국가 재정의 실권을 잡았으나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맘여, 10년간 본국 정부의 자객들을 피해 일본각지를 방랑한 후
1894년
상해로 건너갔다가 동화양행 객실에서 본국 정부의 자잭 홍종우(洪種宇)에게
살해당했다. 시체는 본국으로 옮겨져 양화진에서 능지처참 되었다.
갑오경장으로 개화당 내각이 조직된 이듬해 법무 대신 서광범과 총리
김홍집(金弘集)의 상소로 반역죄가 용서되고, 1910년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