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0년(고종 17)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참판(參判) 등을 지냈다. 1882년 수신사(修信使) 박영효(朴泳孝)의 도일에 수행, 문물제도를 살피고 정치개혁을 계획했다. 귀국 후 김옥균(金玉均) 등 개화당(開化黨) 소장층들과 집권층인 수구당(守舊黨) 제거를 획책하였고, 1884년 우정국사건(郵征局事件)에 가담, 개화당 내각이 수립되었으나 사흘 만에 와해되자 일본에 망명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후 제2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법부대신(法部大臣)이 되었으나 친로파(親露派) 및 사대수구파(事大守舊派)와 대립되어 그들의 압력으로 주미공사(駐美公使)로 부임한 후 임지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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