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부유수 김영작(永爵)의 아들이다.
1868년(고종 5)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광양 현감(光陽縣監)을 거쳐 1880년 예조 참의로서 수신사가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이어 귀국할 때 중국인 황준헌(黃遵憲)이
쓴 [조선책략(朝鮮策略)]을 소개하여 개화정책을 적극 추진케한 공으로
예조 참판에 승진했으나 개화를 반대하는 유학자들의 척사운동[ 척사위정파(斥邪衛正派)]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책을 소개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1882년 구미(歐美) 열강의 통상요구에 따른 복잡한 국내문제와
임오군란(壬午軍亂)의 뒷처리 등으로 다시 기용되어 미국 ·영국 ·독일
등과의 수호조약 체결에 부사로서 활약하고 이어 제물포조약 체결에
외교수완을 발휘하여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나자 우의정 ·좌의정
등으로 전권대신(全權大臣)이 되어 한성조약(漢城條約)을 체결하였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 일본 세력의 침투가 표면화되자
그 힘을 빌어 제1차 김홍집 내각을 조직, 총리대신이 되었다.
청일전쟁의 결과 일본의 우위가 인정되어, 일본의 강요로 강력한 친일파가
입각 함으로써 제2차 김홍집 내각이 조직되었다 이때
총리대신으로 홍범 14조(洪範十四條)를 발표하는 등 새로운 국가의 체게를
세우고 갑오개혁(甲午改革)[갑오경장]의 단행했다 . 그러나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등과의 대립으로 내각은 와해되고,
이어서 들어선 박정양(朴定陽)내각이 열강에 접근하려는 정책을 쓰자,
일본은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켜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한 뒤 제3차 김홍집내각을
세웠다.
일본의 압력으로 단발령(斷髮令)의 강행 등 과격한 개혁을
실시했으나 전국에서 봉기한 의병에 의해서 규탄 받았고, 1896년 러시아의
세력이 증대하여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친러파(親露派) 내각이 조직됨으로써, 김홍집
내각은 무너지고 많은 대신들이 피살, 자신도 광화문에서 난도들에게
살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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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항상 조선이 발전하려면 선진 외국과
제휴해야 한다는 개화 교류사상의 확고한 신념과 이상을 피력하였다.
그의 개화사상의 특징은, 개화는 필연적으로 실현시켜야 하지만,
급진적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며 점진적 방법만이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3차의 내각을 성립시켰으나,
외세의 도전을 자력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을 실천하기도 전에, 정국의
혼란으로 군중에게 살해되는 비극을 감수해야 했다.
순종 때 대제학이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이정학재일록(以政學齋日錄)'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