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충정공(忠正公) 김익겸(益兼)이며,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해평윤씨로 참판 윤지의 딸이다.
구운몽(九雲夢)을 지은 서포 김만중(萬重)은
그의 아우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52년(효종 4) 생진양시에 장원하고 다음해 별시문과에 을과 3인으로 급제하여 장예원, 승문원 주서,
설서를 역임하고 예조, 병조좌랑과 사헌부지평을 지냈다. 사간원 정언, 홍문관 부수찬, 부교리에 임명되었다.
1659년 효종이 승하한 후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논란이 일자 서인으로 윤선도 등을 공격했다. 1660년(현종 4) 수찬이 되었다.
다음해 응교, 사복시정, 성균관사성,
의정부 사인, 동부승지를 거쳐 1666년(현종 8) 전라도관찰사로 임명되었으나 편모를 떠나 멀리 갈 수 없다고 사양하니 대사간이 되고 곧
좌승지로 옮겼다. 다음해 예조참의에 승진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그 후 광주부윤에 제수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1671년(현종 13) 딸이 세자빈이
되었고, 이후 예조참판에 승진, 승문원 제조, 도총부부총관, 관상감 제조를 겸했다가 병조참판으로 옮겼다.
다음해 대사성이 되고 곧 부제학으로
전보되었다가 양관대제학, 지성균관사, 동지경연사에 동지의금부사를 겸임했다.
다음해 병조판서에 지춘추관사를 겸했고
1674년(현종 16)
예조판서로 옮겨 정헌대부로 승진되고 다음해(숙종 2) 국구로서 영돈녕부사,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에 책봉되었고 도총관, 호위대장, 전생서 제조를
겸했다. 1680년(숙종 7) 분충효의병기협모보사공신 1등에 책록되었고
1686년(숙종 13) 풍정도감(豊呈都監) 도제조를 지냈다. 효종이 승하한 뒤로 국세가 쇠약해 지고 국방력이 차츰 무너지므로 벼슬을 버리고 정양할 뜻이 있었으나 갑자기 국구가 되어 거취가 양난할 뿐 아니라
위기를 당하여 형세가 급박하고 사화가 잇따르니 충성과 지혜를 다하여 종사를 편안케 하고 훈업을 이룬 뒤 벼슬을 헌신같이 버리고 일 없는 듯이
자처하려 했으나 국가에서는 주석같이 의지하고 선비들은 산악같이 우러렀다. 좋아하지 않던 사람들도 처음에는 헐뜯었으나 아무리 살펴도 털끝만큼도 흠
잡을 곳이 없으므로 결국은 따랐다.
경서 사기외에도 제가서에도 달통하였으며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서는 시문(詩文) 16권과 '서석집'을 남겼으며, 1719년(숙종 46) 현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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