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5년(현종 6)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정언(正言), 지평(修撰),
수찬(修撰), 교리(校理)를 거쳐 1671년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어 경기, 삼남(三南)의 진정을 조사했다.
이듬해 겸문학ㆍ헌납(獻納)을 역임, 이어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1674년 인선왕후가 죽어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서인이 패하자 관직을
삭탈당했다가 다시 등용되어 1679년(숙종 5) 예조 참의,
1683년 공조
판서, 이어 대사헌이 되었으나 조지겸(趙持謙) 등의 탄핵으로 전직되었다.
1685년 홍문관 대제학이 되고, 이듬해 지경연사로 있으면서 김수항(金壽恒)이
아들 창협(昌協)의 비위 사실까지 겹쳐 처벌됨을 부당하다고 상소했다가
선천(宣川)에 유배, 1688년 방환되었다. 이듬해 박진규(朴鎭圭), 이윤수(李允修)
등의 탄핵으로 다시 남해(南海)에 유배, 여기서 "구운몽(九雲夢)"을 집필한 후
병사했다. 효성이 지극하여 귀양갈 때 외에는 노모 곁을 떠난 일이
없었고 "구운몽(九雲夢)"도 그의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쓴 것으로 전문을
한글로 쓴 문학이라야 진정한 국문학 이라는 문학관을 피력했다.
1706년(숙중 32) 효행에 대해 정표가 내려졌다.
그 외의
작품으로 "서포집(西浦集)", "서포만필(西浦漫筆)",
"고시선(古詩選)"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