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씨는 원래 중국 제요의 후손이 유땅에
봉해지면서 유씨로 성을 받은 것이다. 그후 수천년을 지나
초한 시대에 이르러 유방(한고조)이 중원을 통일하고 한제국을 창건하면서
유씨가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우리나라 유씨의 도시조인 유전(劉筌, 시호는 문양)은
한고조의 41세손으로 도학과 문장이 뛰어났고 송나라에서 벼슬이 병부상서에
이르렀다. 그는 1082년(고려 문종 36년) 8학사의 일원으로 고려에
들어온 후 경북 영일군에 정착하여 살았으며 고려 공민왕 때에 이르러
특명으로 그를 위한 사우가 건립되고 고려 태조와 함께 7왕을 모신 숭의전에
배향되고 있다.
·거창유씨 - 유전의 첫째 아들 유견규(堅規)가 거타(거창)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본관을 거창으로 했다. ·강릉유씨 - 유전의 12세손인
유창이 조선개국공신 2등으로 옥천(강릉) 부원군에 봉해져서 본관을
강릉으로 하였다. ·배천유씨 - 유전의 8세손 유국추(國樞)가 백천군에
봉해져서 본관을 백천으로 하였다. |
유씨(劉氏)는 중국에서 계출된 성씨로 우리나라 유씨(劉氏)의 연원(淵源)은
유방(劉邦)의 41세손으로 송나라에서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낸 유전(劉筌)이 8학사(八學士)의 일원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경북 영일군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면서부터 이다. 전(筌)은
3아들(장남 견규(堅規), 차남 견구(堅矩), 3남 견익)을 두었다. 맏아들인 유견규(劉堅規)가 거타(居陀 :
거창의 옛
지명)군(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거창(居昌)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인물을 살펴보면 견규의
동생
견구(堅矩)가 대사헌(大司憲)을 지냈으며, 견구(堅矩)의 아들 웅열(雄悅)이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로 아림군(娥林君)에
봉해졌고, 견구(堅規)의 손자 성(成)이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와 대장군(大將軍)을,
증손 찬(贊)이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이 외에도 검교 대장군(檢校大將軍)을 지낸 한작(漢灼)과 집현전
대제학(集賢殿大提學)을 역임한 해(海), 그리고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이른 귀손(貴孫)이 유명하였으며, 특히 본휘가 利貴인 한우(旱雨 :고려 충혜왕 4년
甲戊 5월 5일 ~ 세종
癸卯 4월 11일)는 고려조에 장원 급제(충정왕 원년 中司馬時 年16恭愍王登文科壯元) 후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왕조를
세우는데 일익을 담당하였으며, 서운관원으로 한양의 궁터를 잡았다. 태종 시절에는
검교판한성부사(한성판윤)로 태조의 영전과 재궁의 터를
상지하였다. 또,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낼 때 중국(中國)
황제(皇帝)의 부름에 따라 기우제관(祈雨祭官)으로
파견되어 3일간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니 한재(旱災)가 계속된 중국 대륙(中國大陸)에 비가
내렸다 한다. 이에 황제(皇帝)가 크게
기뻐하여 한우에게 雨師란 호와 통헌대부(通憲大夫)·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제수하였다. 한우(旱雨)는
방조(方祚:한성좌윤),
안조(安祚:광록향군기감사정), 응조(應祚:한성좌윤), 석조(碩祚:신계현령) 네 아들을 두었다. 중종 시대에 태어난
우삼(友參)은 의금부도사를 지냈고 4남을 두었는데, 장남인 덕개(德盖)는 대과급제 후
홍문관 정자 시절 高敬命, 朴天挻, 金馨遠과
道義至交三南士論 이루었다. 3남 명개(名盖)는 정유재란시 의병장으로서 왜병에 항거하다가 안의 황석산성에서
순절을 하였다. 인조시대에
태어나 숙종 시대에 명성을 떨친 경남 산청의 전설적인 名醫 유이태(劉以泰 : 165? ~ 1715)는 의병장 명개(名盖)의
현손으로
을병년에 흉년이 들었을 때 경상좌우도의 부유한 친구들에게 백미 100여석을 얻어서 자신은 한톨도 사용하지 않고 오직 굶주리고 있는
이웃 사람들을 구하는 선행(善行)과 역병(疫病)이 창궐(猖獗)하였을 때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고 고통을 받고 있는 수많은 환자들을
구한 의술 기행을 남겼다. 그는 귀천(貴賤), 빈부(貧富), 친소(親疎), 민관(民官),
노소(老小)에 관계없이 고통을 받고 있는
환자들을 치료하였고, 치료비를 받지 않는 등 수많은 의술 기행을 남겼다. 그의 효행(孝行), 선행(善行) 및
의술(醫術) 기행(奇行)
때문에 사우(師友) 99명이 연명하여 표창을 주어야 하는 상소문을 나라에 올리기도 하였다. 그는 숙종 御醫로서 숙종을 병환에서
구한
공로(功勞)으로 나라로부터 숭록대부(종1품)의 품계를 받았었고, 국왕(숙종)이 제수한 관직(경기 안산 군수)도 고사하고 오직 고통을
받고 있는 환자만을 치료하였었다. 말년에는 나병 치료에 혼신의 힘을 쏟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태(以泰)는 마진편(홍역전문치료서)를
남겼으며, 산청에서는 300여년 전의 한국의 슈바이처로 그리고 神醫로 불려지고 있다.
또한 현재도 산청에는 청나라 황제의 등창을
치료한 공로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綠大夫)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제수 받았으나 고사하고
고국으로 돌아와 병을 고쳤다는
일화(낙반비배토)가 전해지고 있으며, 그는 내과, 소아과, 산부인과, 종기, 홍역, 독약, 나병, 침술에 능하였다. 특히
침술의
대가로서 닭에 9기의 침을 꽂아서 걸어가게 하는 이야기(9침지회)가 경남 산청 지방에 회자되고 있고, 많은 구전 이야기가 현재까지 전해져
오고 있고,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의술에 대한 이태의 이야기가 한의로서 가장 많이
실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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