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0년(충혜왕 복위 1) 문과에 급제하여 좌부대언, 전리판서
등을 지낸 후 안동사록(安東司錄)으로 강릉대군(江陵大君,
恭愍王)을 시종, 1944년 동안 원나라에 가 있었다. 1351년 공민왕의 즉위로 함께 귀국하여 좌부대언을 지내고, 좌사의대부 때 조일신(趙日新)의 무고로 파직 낙향하였다.
조일신이 죽자 복직하여 대언(代言) ·추밀원직학사 등을 거쳐,
1359년(고려 공민왕 8) 추밀원지사 때 앞서 1356년에 기철(奇轍) 일당을 제거한 공로로 안사공신(安社公臣)에 책록되었다.
이어서 동경유수(東京留守) 등을 지내고,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했을 때 왕을 남행하게 한 공로가 인정되어 충근절의찬화공신(忠勤節義贊化功臣)이 된 데 이어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올랐으나 노령을 핑계로 퇴관한 뒤 서령군(瑞寧君)에 봉해졌다.
1363년 흥왕사(興王寺)의 변란 때 세운 공으로 1등공신(一等功臣)에 책록되고,
정당문학겸감찰대부(政堂文學兼監察大夫)가 되었다. 그 뒤 첨의찬성사상의회의도감사예문관대제학춘추관지사(僉議贊成事商議會議都監事藝文館大提學春秋館知事)가 되었으나,
그의
충직을 두려워하는 신돈(辛旽)의 모함을 받아 낙향하였다가 신돈의 하수인에게 영광(靈光)에서 죽음을 당했다.
공민왕 묘정에 배향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