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비(寺碑)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중이 되어 각지를 방랑하다가
김원명(金元命)의 추천으로 공민왕을 만나고 나서부터 신임을 얻어 정치종교의
대권을 장악했다. 1365년(공민왕 14)에 진평후(眞平侯)에 오르고
수정리순론도섭리보세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영도첨의사사, 판감찰사사,
취성부원군, 제조승록사사 겸 판서운관사가 되었다. 이듬해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하여 자신이 판사에 취임, 문란한 토지제도를 개혁,
농민의 권익옹호와 국가재정의 충실을 꾀했다. 왕의
신임이 두터운 점을 기회로 권력을 남용하여 인망을 잃었다. 1367년
영록대부 집현전 대학사(榮祿大夫集賢殿大學士)에 올라 귀족세력의 기반을
무너뜨리고자 천도(遷都)를 건의했으나 왕과 대신들의 반대로 실패했다.
왕의 신임을 얻게 되자 반역을 획책하다 참형(斬刑)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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