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보의 아들이다.
1522년(중종 17) 생원으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
정사가 되어 사가독서를 했다. 그 뒤 검열, 부수찬 등을역임, 권신
김안로(金安老)
의 배척을 받아 강원도 도사로 좌천, 그 후 여러 직을 거쳐
1541년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1542년(중종 37)에 백운동(순흥)에 안향(安珦)의
사당 회헌사를 세우고, 1543년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 서원(白雲洞書院)을
창설했다. 또한 재임시 최초로 인삼을 재배시켜 공삼의 폐를 덜어
주었다. 그 후 직제학, 도승지, 대사성, 호조참판을 지내고
1551년
황해도 관찰사가 되어 해주에 수양서원을 창설,
최충(崔冲)을 제향했다.
그는 시문에도 뛰어나 "태평곡", 육현가"
등 4편의 장가와 군자가 등 단가 여덟 수를 남겼으며, 일생을 청념하게
살아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덕연,
도연, 소수 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 또는 편서로는 무릉잡고(武陵雜稿),
죽계지(竹溪誌), 동국명신언행록(東國名臣言行錄), 심도설(心圖說),
심경심학도(心經心學圖)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