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5년(목종 8) 문과에 장원하고,
1011년(현종 2) 우습유(右拾遺)를 거쳐 1013년 국사수찬관(國史修撰官)이 되어 칠대실록(七代實錄,
태조~목종) 편찬에
참여했다. 1033년(덕종 2) 형부상서, 평장사, 수도사 상주국을 거쳐
1047년(문종 1)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어 율령을 가르침으로써 고려 형법의 기틀을
마련했고, 1050년 개부의동삼사 수태부로 추충찬도공신이 되었다.
1053년 궤장을 하사받고, 이어 추충찬도 협모동덕치리공신(推忠贊道協謀同德治理功臣)으로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겸 문하시중, 상주국치사(開府儀同三司守太師 兼 門下侍中上柱國致仕)가 되고,
1055년 내사령(內史令)으로 관직을
물러났다. 뒤에 내사문하성으로 개칭되자 중서령치사가 되고, 추충찬도좌리동
덕홍문의유보정강제공신(推忠贊道佐理同德弘文懿儒保定康濟功臣)에 올랐다. 벼슬을 그만 둔 후에 사숙을
열어 많은 인재를 배출하자 다른 유학자들이 이를 본떠 당시 11개의
사숙이 개설되어 그의 사숙과 함께 12공도(公徒)로 불렸다. 당시의 명유로서
해동공자(海東孔子)로 추앙되었고, 그의 제자들을 가리켜 문헌공도(文憲公徒)라 했다.
선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해주 문헌서원(文憲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는 "최문헌공유고(崔文憲公遺稿)"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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