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전신인 사로(斯盧, 서라벌)의 6촌 가운데 취산 진지촌장
지백호의 원손(遠孫)으로 전하는 정회문(澮文, 신라 때의 안일호장(安逸戶長)을
지냄)을 원조로 하고 있으나 문헌(文獻)이 실전(失傳)되어
연대와 자세한 사적 및 전후세계를 상고(詳考)할 수 없다. 그래서
후손 고려 초에 동래군 보윤호장(甫尹戶長) 정지원(之遠)을 일세조로
하여 누대에 걸쳐 정착 세거 해온 거칠소부(居漆少部, 지금의 부산
동래)가 동래(東萊)로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정지원(之遠)의 아들 문안공(文安公) 정목(穆,
1040∼1106)은 상서좌복야(左僕射)를 지냈고, 정목의 아들 정항(沆)은
문종 ·인종 때 우사간 ·충청도안찰사 등을 지냈으며, 정항의 아들이
'정과정곡'으로 유명한 정서이다. 동래정씨는
정지원의 6세에서 교서랑(校書郞, 輔)파와 첨사공(詹事公, 弼)파의 2파로
대별된다. 이들 2파는 후대로 내려오면서 각각 여러
파로 분화하는데 첨사공파 중에서도 직제학공파(直提學公派)와 대호군파(大護軍派)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직제학공파의 파조(派祖) 정사(賜,
세종
때 예문관직제학)는 아들 5명, 손자 10명을 두었으며 그중 셋째 아들 정난종(蘭宗)은 동래정씨 중흥의 조(祖)라 할 수 있다. 정난종은
세조~성종 때 훈구파(勳舊派)의 중진으로 이조판서 ·우참찬을 역임하였고,
문익공파(文翼公派)로 불리는 정광필(光弼)은 그의 둘째 아들이다.
그 밖에 중종 때 대제학을 지낸 정사룡(士龍), 선조 때 우의정
정지연(芝衍), 숙종 때 우의정 정재숭(載嵩), 헌종 때 영의정 정원용(元容),
정조 때 우의정 정홍순(弘淳) 등이 있으며, 대호군파는 정여립(汝立)의 모반사건으로
몰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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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표적 인물(代表的人物) ]
정항(沆) : 고려사에 입전된 문안공.
정서(敍) : '정과정곡(鄭瓜亭曲)'으로 한국문학사에
이름을 남겼다. 직제학공파 ☞
정난종(蘭宗) : 성종 때 문신,
학자로 글씨가 능했다. 정광필(光弼) :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내고 기묘사화 己卯士禍) 때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을 구하는 데 힘썼다.
정유길(惟吉) : 정광필의 손자로서 선조 때 좌의정을 지냄.
정태화(太和) : 인조∼효종대에
영의정을 지내고 현종의 묘정에 배향됨. 정치화(致和)
: 현종 때 좌의정
정지화(知和) : 현종 때 좌의정에
올라 3정승이 나왔다. 정재숭(載嵩) : 태화의 아들,
숙종 때 우의정 교서랑공파 ☞ 정갑손(甲孫)
: 세종 때 청백리, 좌참찬 겸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정창손(昌孫) : 세조 때 좌익공신,
예종때 익대공신에 녹훈되었다. 정대년(大年)
대호군파 ☞
정여립(汝立)의 모반사건으로 된서리를
맞았다. 조선시대에 정승
17명, 대제학 2명, 문과 급제자 198명을 배출했는데 상신(相臣) 17명은
왕손인 전주이씨의 22명에 버금가는 숫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