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8년(인조 6)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631년
정언을 거쳐 이듬해 이조좌랑이 되고, 이어 부교리, 헌납, 사인, 부응교를
역임하고 1635년 사간이 되었다. 이 해 북변의 경비를 강화하기
위해 원수부가 창설되자 종사관이 되고, 이듬해 병자호란에 패잔병을
수습하여 적과 항전해서 많은 적을 죽인 공으로 집의가 되었다.
1637년 소현세자를 심양에 배종하고 1638년 충청도 관찰사에 오르고,
이어 동부승지·우부승지를 지내고 원접사로 청나라 사관을 맞았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1644년 이조참판으로 접반사를 겸하고 이듬해
호조판서를 거쳐 대사헌으로 소현세자가 죽자 봉림대군의 세자 책봉을
반대했다. 1648년 형조판서에 전임, 이듬해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이
되어 사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온 후 영의정에 올랐다. 모친상을
당해 사직했다가 1650년 좌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이듬해
다시 영의정이 되어 1657년까지 재직하고 다음해 병으로 사직했다.
1659년 다시 영의정이 되었고, 효종이 죽자 송시열(宋時烈)의 기년설을 지지해
시행케 했다. 1662년(현종 3) 진하 겸 진주사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1671년 기로소에 들어갔다.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양파유고(陽坡遺稿), 양파연기(陽坡年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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