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민란의 주모자로 처형당한 후부터 사회개혁을
결심했다. 30세 때 동학에 입문, 고부접주(古阜接主)가 되어 각지를 다니며
동지를 규합, 1892년 조병갑(趙秉甲)이 고부군수로 부임하여 세금이
과중하고 근거 없는 죄명을 씌워 양민의 재산을 갈취하는 등 탐학이
심한 데 항거, 동학교도를 이끌고 궐기하여 이 기회에 정치 및 사회
제도의 전면개혁과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동학사상을 펼 뜻을 굳혔다. 같은
해 3월 동지 정익서(鄭益瑞), 김도삼(金道三)과 협의하여 동학조직을
이용, 동학교도를 주도세력으로 하고 농민대중의 호응을 얻어 진용을
정비한 후 8천여 명의 병력으로 대오를 편성, 동도대장(東徒大將)이 되어 척왜(斥倭),
척양(斥洋), 부패한 지배계급의 타파 등 4대강령을 내세우고 부근의 군읍으로
전격하여 군관을 무찔렀고, 부안, 정읍, 고창, 무장에 이어 4월에는
전주를 점령했다. 그러나 정부의 요청으로 청군이 오고 동시에 천진조약을
빙자하여 일본군도 입국하여 국가의 운명이 위태롭게 되자 탐관의 응징,
시정의 개혁, 노비의 해방 등 12개 조목의 실현을 확약받고 일단 휴전을
성립시켰다. 그러나 부패한 지배계급의 근절과 근본적인 시정개혁이
실현되지 않아 재궐기를 계획하던 중 청일전쟁이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전개됨에 따라 점차 조선에서의 침략행위를 더해 가는 일본의 흉계에
격분, 다시 봉기했다. 이해 9월에 삼례에서 남도접주로 12만의 병력을
지휘, 북도접주 손병희(孫秉熙)의 10만과 연합,
교주 최시형(崔時亨)의 총지휘하에
항일구국의 기치를 들고 대일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우수한 무기와
조직적인 훈련을 받은 일본군에게 도처에서 분쇄되고 말았다. 이에
수명의 동지들과 순창(淳昌)에 피신하여 재기를 도모하다가 현상금을 탐낸
사람과 지방민의 급습으로 체포되어 이듬해 3월에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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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기의 녹두장군, 이땅에 최초로 자유민주주의의
싹을 트게한 동학혁명의 지도자이다. 그는 삼충공의
한 사람인 전락의 후손으로 그의 아버지가 민란의 주모자로 처형되자
사회개혁을 결심하고 30세 때 동학에 입문하여 고부접주(古阜接主)가
된다. 그리고 당시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학정에
백성의 고통 받자 보다 못해 동학혁명을 일으켜 백성이 나라의 주인임을
일깨워준다. 처음에는 계속 승전하여 전주를 점령하고
크게 전세를 떨쳤으나 정부의 요청으로 청군이 들어오고, 천진조약(天津條約)을
빙자해 일본군도 입국하자 이천, 목천, 공주의 혈전에서 패배하고, 현상금을
탐낸 한신현(韓信賢)등의 지방민에 의해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당했다.
이러한 동학혁명에서 불붙기 시작한 민중혼은 일제의
암흑기에 이르러 숱한 독립투사를 배 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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