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세 때 북청에서 초시에 합격, 1894년(고종
31) 함흥 순릉참봉이되었다. 다음해 법관양성소를 졸업,
1896년 한성재판소 검사보가 되었다가 사임하고, 서재필,
리승만, 이상재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 초대 평의장에 취임했으며, 서재필(徐載弼),
이승만(李承晩)과 함계 <독립신문(獨立新聞)>을
발행했다. 이 해 친로파 내각의 탄압을 피해 일본으로 망명하여
1898년 와세다 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귀국, 독립협회의 일을 보았다.
1904년(광무 8) 일본이 국내의 황무지 개간권을 얻으려고
하자 대한보안회를 조직, 이를 저지시키려는 민중운동을 전개했고,일진회에
대항하여 윤하영, 양한묵 등과 공진회를 조직, 회장이 되어 친일적인
대신들을 규탄하다가 철도로 유배, 다음해 민영환(閔泳煥), 이용익의 주선으로
석방된 후 윤하영(尹夏榮), 양한묵(梁漢默) 등과 헌정연구회를 조직,
다시 항일국민운동을 벌이면서 1905년 유성준(兪星濬), 전덕기(全德基)
등과 국민교육회를 조직한 후 보광학교를 세웠고,이 해 평리원 검사를
거쳐 특별법원 검사에 임명되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
가담, 국채보상연합회의소 소장이 되어 모금운동을 버렸으나 일진회의
방해공작으로 좌절, 이 해 고종으로부터 화란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라는 밀령으로 4월 22일 서울을 출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
페테르부르크에서 이위종(李瑋鐘)과 합류, 헤이그에 도착하여 회의 개최일인 6월 5일 의장을
방문하고고종의 친서와 신임장을 전했으나 일본인의 방해로 회의에 참석할자격을
얻지 못하고 울분으로 순국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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