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인 아버지 이범진(李範晉)을 따라 어린 시절부터
영국·프랑스·러시아 등을 순회하여 영어·프랑스어·러시아어 등에
능하였다.
일찍이 러시아 페테부르크 주재 한국공사관 참사관을 지내다가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으로 공사관이 철수된 후에도 계속 러시아에
머물러 있었다. 1907년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고, 이준(李儁), 이상설 등과 함께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화란 헤이그에 갔으나 일본의 방해공작으로
참석을 거부당했다. 때마침 만국기자협회의 호의로
연설할 기회를 얻게 되자 한국을 위해 호소하는 제목으로 한국의 억울한
처지와 일본의 야만적 침략을 공박, 세계의 여론에 호소했다. 이때
일본 정부는 이들 3인에 대한 궐석재판을 본국에서 열고 종신징역을
선고, 체포령을 내리자 이미 순국한 이준(李儁)을 헤이그에 묻은 후, 이상설과
함께 페테부르크·런던을 거쳐 미국으로 갔다. 그 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항일투쟁을 하다가 다시 페테부르크에 갔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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