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 한학을 배웠으며, 1894년(고종
31) 배재학당에 입학, 이듬해 졸업하고 모교의 영어교사가 되었다.
이 무렵 개화사상에 눈을 뜨고 기독교에 입교하는 한편,
서재필(徐載弼)의 영도하에 설립된 협성회, 독립협회 등의 간부가되어 개화운동에
투신했다. 1898년(광무 2) 정부 타도를 획책했다는
황국협회의 무고로 독립협회의 간부와 함께 투옥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1904년 민영환의 주선으로 석방, 이해 겨울 미국에 건너가 일본의 한국
침략에 대한 미국 정부의 관여를 호소했으나 실패했다. 그
후 미국에 머물면서 워싱턴대학, 하버드대학 등에서 수학, 1910년 프린스턴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해 한일합방이 조인되자
귀국하여 기독교 청년회를 중심으로 활약하다가 투옥, 미국 선교사의
주선으로 석방되어 1912년 미국에서 열린 세계감리교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했다. 1914년 하와이에서 '한국태평양(韓國太平洋)'을
창간, 독립정신을 고취했고, 1917년에는 호놀룰루에 기독교학원과 독립군관학교를
세웠다. 1919년에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대통령에
추대되었고, 1921년 임시정부의 배척으로 대통령을 사임하고 계속해서미국과
하와이를 근거로 독립운동을 했다. 1945년 10월에 귀국,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총재ㆍ대한민국대표 민주의원 의장, 민족통일총본부
총재 등을 역임, 이듬해 한국의 독립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미국에
다녀왔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초대의장이
되고, 7월에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후 강력한
반공배일정책을 견지하고,국내의 공산주의운동을 분쇄했으며, 6ㆍ25동란
때는 U.N.의 도움을 얻어 공산군을 격퇴했다.
1951년 장기집권을 목적으로 자유당을 창당, 이듬해 정치파동을
일으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1954년 초대대통령에 대한 중임제한조항(重任制限條項)
철폐를 골자로 한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으로 대통령에 3선되었고,
그러나 자신의 장기집권을 위해 자유당을 창당, 여러
차례 불법적 개헌을 하여 물의를 일으켰으며 1960년 3ㆍ15 부정선거로
대통령에 4선되었으나 4ㆍ19 의거로 하야(실각), 하와이에 망명하여
병사했다.
저서로 "독립정신", "일본폭로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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