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0년(선조 13)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 권지부정자를
거쳐 이듬해 검열이 되었다. 1583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이어 저작,
박사, 전적, 정언, 수찬, 이조정랑 등을 역임하고, 1589년 예조정랑으로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다스렸다. 그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이
되었으며, 그후 여러 직을 거쳐 좌승 지로 재직 중 정철(鄭澈)의 죄를 가볍게 처리했다
해서 일시 파직되었다. 그후 다시 도승지에 발탁되어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왕비를 개성으로, 두 왕자는 평양으로 호위하고, 선조를 의주로
호종했다. 그 사이 이조참판으로 오성군(鰲城君)에 봉해진 후 형조판서로
도총관을 겸직, 다시 대사헌을 거쳐 병조판서가 되었다. 이덕형(李德馨)과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한편 전국에 근왕의 군사를 모집했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겸직, 원접사(遠接使)가 되고, 1594년 병조판서로 주사대장을 겸직,
다음해 이조판서,
양관대제학, 지의금부사, 우참찬 등을 역임하고, 1597년 병조판서로
있다가 병으로 사임했다. 이듬해 우의정이 되어 진주사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1599년 좌의정, 다음해 우의정으로 전임, 도원수로 도체찰사
등을 겸직하고, 영의정에 승진했다. 1602년 오성부원군에 진봉되고,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扈聖功臣) 1등에 봉해졌다. 1617년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를 극력 반대하다가 유배되어 배소에서 죽었다.
죽은 그해 바로
복관되고, 청백리에 녹선 되었다.
포천의 화산서원(花山書院), 북청의 노덕서원(老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사례훈몽(四禮訓蒙, 1622), 주소계의(奏疏啓議), 노사영언(魯史零言)과 시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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