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0년 별시문과에 급제, 정자를 거쳐 1583년 사가독서를
하였다. 그 후 수찬, 교리, 대사간, 대사성을 역임하고 1592년 31세로
예조참판에 올라 대제학을 겸임했고 이해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동지중추부사로
일본 사신 겐소등과 화전을 교섭하였으나 실패했다. 그 후 왕을 호종,
경주에 이르러 청원사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원병을 요청, 지원군을
파견케하였다. 귀국 후 한성부 판윤에 오르고 명나라 원병이 들어오자
명장 이여송(李如松)의 접반관으로 전쟁중 항상 그와 행동을 같이했다.
1594년 이조판서를 역임, 1595년 경기, 황해, 평안, 함경 4도의체찰부사를
지냈으며 1598년 37세로 우의정에 승진, 이어 좌의정에 올라 훈련도감도제조를
겸했다. 1601년 행판중추부사로 경상, 전라, 충청, 강원도의 4도
도체찰사가 되어 전쟁 후의 민심수습과 군대의 정비에 노력하는 한편
대마도의 정벌을 건의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다음해 영의정에
승진, 1606년 한때 영중추부사의 한직에 밀려났다가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진주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영의정에 복직, 1613년 영창대군의
처형과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삭직, 양근에 내려갔다. 어렸을 때
이항복(李恒福)과 절친한 사이로서 기발한 장난을 잘하여 야담으로 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글씨에 뛰어났다. 뒤에 복관되었다.
포천의
용연서원, 상주의 근암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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