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의 후손이다.
1558년(명종
13) 문과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고, 당시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부친이 이인임(李仁任)이라고 명나라에
잘못 기재된 것을 여러 차례 진정하다가 승지에 올라 종계변무 주청사로
명나라에 가서 정정시켰다. 이어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 1등이
되어 장계부원군에 봉해지고 예조를 거쳐 병조판서에 전임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소사가 되어 왕자 순화군 보를 배종하여
강원도에 들어가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8도에 돌렸으며 왜군의 진격으로
회령에 들어갔다가 모반자 국경인(國景仁)에 의해 임해군·순화군 두왕자와
함께 잡혀 왜장 가토로부터 선조에 항복권유를 쓰라는 강압을 받고 거부했으나
두 왕자와 그의 손자를 죽이겠다는 위협을 받고 아들 혁이 대신 썼다.
이에 그 항복을 권유하는 내용이 거짓임을 밝힌 또 한 장의 글을 썼으나
이를 입수한 제찰사가 묵살함으로써 석방된 뒤에 동인들의 탄핵을 받고
유배되었다. 1597년 풀려났고, 죽은 뒤에 신원되었다.
문장·시·서예에
능했다.
저서에 지천집(芝川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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