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조선 선조 25)에서 1598년(선조 31)까지
2차에 걸쳐 왜군(日本軍)이 우리 나라에 쳐들어온 싸움.
임진년에 일어났다 하여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
하며, 정유년에 또다시 쳐들어온 싸움을 따로 정유재란이라고 한다.
조선은 선조 때에 접어들어 양반들이 당파 싸움을
일삼으면서 국방을 소홀히 하였다. 이이(李珥)가 ‘십만 양병설’을
주장하여 국방의 중요성을 역설해도 도리어 지배 계급들은 배척하는
실정에 있었다. 그 처럼 조선이 안일한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일본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나와 혼란기를 수습하고, 전국을
통일하여 봉건적인 지배권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도요토미는 국내 통일에
이용한 제후들의 힘을 밖으로 돌려 자체의 불안을 없애려 했다. 특히
당시 유럽에 의해 발전한 신흥 상업의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서도 대륙
침략을 꿈꾸게 되었다. 그의 처음 의도는 조선과 동맹을 맺고 명나라를
침공하자는 데에 있었다. 조선에 서신을 보내어 통신사를 보낼 것을
요구해 왔다. 무례한 구절이 있어 거절했으나 재차 교섭이 와서 황윤길과
김성일을 보내어 그들의 속셈을 살폈다. 그러나 두 사신의 보고는 상반되어
조정의 대신들도 의견이 엇갈렸다. 황윤길은 서인(西人)이고 김성일은
동인(東人)이라 감정이 대립된 것이다. 결국 조정은 일본의 침략을 예상하는
황윤길의 보고를 무시하고, 김성일의 의견을 따르게 되어 국방을 소홀히
했다. 늦게서야 일본의 대륙 침략 계획을 알아 낸 조정은 요충지인 영남(경상도)에
힘을 기울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고, 다만 전라 좌수사 이순신(李舜臣)만이
전쟁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교섭이 결렬되자, 곧 원정군을
편성하여 1592년(선조 25) 4월에 15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공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를 선봉으로 하는 1군이 부산을 함락, 가토 기요마사와
구로다 나가마사 등과 합세하여 반도를 세 갈래로 나누어 침공해 올라왔다.
조정에서 급파한 이일과 신립이 상주와 충주에서 전사하자 서울의 민심이
동요되었다. 5월 2일에 서울이 함락되고 6월에 평양을 빼앗겼다. 대궐을
불태우고 임금이 피난을 가자 백성의 원망이 극도에 이르렀다. 가토
기요마사는 함경도로 북진, 회령에서 두 왕자를 포로로 잡기에 이르렀다.
한편 해상에서는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이 패하여 많은
함선을 잃었으나, 전라 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의 등장으로 전세가 역전되었다.
특히 거북선으로 많은 전공을 세웠다. 이순신(李舜臣)은 평상시부터 정비해 두었던
전선을 이끌고 경상도 해안에서 일본의 수군을 닥치는 대로 격파했다.
1차는 옥포(玉浦)에서, 2차는 사천(泗川), 당포(唐浦), 당항포(唐項浦)에서, 3차는 한산 앞바다에서,
4차는 부산 해전에서 적선을 모조리 격파했다. 특히 한산섬(閑山島)에서
적선 60여 척, 부산에서 100여 척을 쳐부수고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적의 통로와 보급로를 차단시켜 버렸다.
한편 내륙에서는 각계 각층의 의병이 일어나 왜군에
항전했고, 명나라의 도움을 얻어 평양을 다시 찾고 남진해 왔다. 서울에
모였던 왜군은 함경도에서 철수한 가토 군과 합세하여 행주 산성을 공격하였으나,
권율(權慄)에 의해 크게 패하였다. 이 싸움은 김시민의 진주 싸움, 이순신(李舜臣)의
한산섬 싸움과 더불어 임진왜란의 삼대첩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때
명나라 군대는 심유경을 내세워 서울에 있는 적과 화의를 교섭, 왜군이
거기에 응하여 1593년(선조 26) 4월에 전군을 남하시켰다. 불리한
처지에서 화의에 응했던 왜군은 갑자기 지난 진주 싸움의 치욕을 보복하려는
듯 진주 산성을 공격하여, 전란 중 가장 치열한 육전이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의병장 김천일, 경상 우병사 최경회, 충청 병사 황진 등이
전사하고 성은 마침내 함락되었다. 그러나 심유경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본영에 들어가 강화 회담이 진행되면서 일단 싸움은 멎었으나, 일본의
무리한 요구 때문에 2, 3년 만에 화의는 결렬되었다.
다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4만 대군으로 재침공하니,
그것이 1597년(선조 30)의 이른바 정유재란(丁酉再亂)이다. 다시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가 침입해 왔다. 그들은 이순신(李舜臣)을 두려워하여 간첩을 침투시켜
그를 모함하는 데에 성공했다. 결국 이순신(李舜臣)은 원균(元均)을 옹호하는
일파의 모함을 받아 옥에 갇혔다. 마침내 일본의 대군이 계속 상륙하자
명나라에서도 다시 원군을 급파했다. 조선에서도 이원익을 체찰사, 권율(權慄)을
도원수로 삼고, 이덕형, 김수 등으로 흥복군(興復軍)을 창설하게 하는
동시에 방어를 굳게 하였다. 이 때 일본 수군은 이순신(李舜臣)이 없는 틈을
타서 해전을 벌이니 원균(元均) 등이 전사하고 전선이 대파되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와 명나라 연합군도 총반격을 가하고, 이순신(李舜臣)을 다시 기용하여
남은 선박 12척으로 해군을 재편성, 결사적인 항전 끝에 제해권을 회복하고,
명량에서 적의 함대 133척을 맞아 대승을 거두었다. 그 무렵 도요토미가
죽자 왜군은 그의 유언에 따라 후퇴했다. 이순신(李舜臣)은 노량(露梁)에서 도망가는
적함 200여 척을 격파하고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7년간의 왜란은 끝났으나 조선, 명, 일본의 3국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특히 싸움터였던 조선은 황폐화되고 백성은 도탄에
빠졌다. 경제적 파탄과 사회 질서의 붕괴를 가져왔으며, 전란에 따른
인명의 손상은 말할 것도 없고, 문화재의 손실과 각처에서 도둑이 날뛰었다.
한편 조정은 유비 무환을 깨닫고 훈련 도감을 만들어 무예를 닦게 했고,
각 지방에도 교관을 두어 무예를 가르쳤다. 무기도 재래식에서 개량,
발명하여 대비했다. 명나라에 대한 사대 사상이 굳혀지는 반면, 왜인에
대한 재인식과 적개심이 더욱 높아졌다.
일본의 경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국민 경제를 퇴락시켜
국내의 봉건 제후의 세력이 약화되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정권 장악을
쉽게 만들었다. 조선에서 다수의 백성을 포로로 데려다 경작 노동에
이용하는 노예 매매를 시작했다. 그 중에는 도자기 기술자가 있어 일본
도자기업을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활자를 탈취해다가 활자
기술의 커다란 발전을 보았다. '퇴계집' '동의보감' 등의 서적을 가져다
문화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
한편 명나라는 대군을 조선에 파병하여 국력이 소모된
데다 국가 재정까지 어려움에 빠져, 만주에 있던 여진족의 세력이 팽창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와서 마침내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넘어가는 계기가
되고, 동양의 국제 정세를 크게 전환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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