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감 허교의 아들이다.
정구(鄭逑)·장현광(張顯光)의 문인,
50여 세가 되도록 세상에 알려
지지 않고 제자백가의 서를 연구하다가 다시 경서의 연구에 전심하였다.
특히 예학에 있어서 일가를 이루었다. 1650년(효종 1) 참봉에 천거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1657년 지평에 초임, 다음해 장령이 되고, 1660년(현종
1)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제1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집권층인 서인
송시열(宋時烈)등이 채택한 기년설을
반대하고 3년설을 주장했으나 기년설이 채택됨으로써 남인은 큰 타격을
받고 모두 숙청당할 때 그는 삼 척부사로 좌천당했다가 2년 뒤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1674년(숙종 즉위) 제2차 복상문제로 예송이 일어나자
서인의 대공설을 반대하여 기년설을 채택케 하는데 송공 한 남인이 집권하게
되자 대사헌에 특진되어 이조참판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고, 이해 장기에
유배중이던 송시열에 대한 처벌문제가 일어나자 영의정 허적(許積)의
의견에 맞서 가혹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 이로 인해 남인은 양파로
갈라져 송시열의 처벌 에 온건론을 주장하던 탁남과 대립, 청남의 영수가
되었다. 1679년 탁남인 허적을 탄핵하다 사직 후 고향에서 저술과
후진양성에 전심했다.
독특한 도해법을 해설한 '심학도(心學圖)'와
'요순우전수심법도(堯舜禹傳授心法圖)' 를 지어 가르쳤다.
글씨는 특히 전서(篆書)에 능하여 동방의 제1인자라는 찬사를 받았고, 그림과
문장에도 뛰어났다.
마전의 미강서원, 나주의 미산서원, 창원의
회원서원에 제향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