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굉필(金宏弼)의 외증손이다.
일찍이 조식(曺植),
이황(李滉)에게 성리학을 배웠다.
1573년(선조 6) 유일로 천거되어 예빈시 참봉(禮賓寺參奉)을 거쳐 1580년 창녕현감에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생사당이 새워졌다. 그 후
지평을 거쳐 1585년 교정청의 교정랑이 되어 '경서훈해(經書訓解)'를
교정했고, 그 후 통천군수, 우승지, 강원도 관찰사, 성천부사, 충주목사,
공조참판등을 역임했다. 1608년(광해 즉위) 대사헌이
되었으나 임해군의 옥사가 일어나자 고향에 돌아갔다. 그
후 향리에 백매원을 세워 유생들을 가르쳤다.
경학을
비롯하여 산수, 병진, 의약 등 여러 방면에 정통했으며, 당대의 명문장가로서
글씨도 잘썼다. 조선 중기의 예학자이며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다. 장현광(張顯光)·심지택(沈之澤)·허목(許穆) 등이 그의 제자이다.
인조반정 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성주의 회연사원, 충주의
운곡서원, 창녕의 관산서원, 성천의 학령서원, 통천의 경덕사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
또는 편서로는 한강집(寒岡集), 성현풍(聖賢風), 태극문변(太極問辨),
수사언인록(洙泗言仁錄), 오복연혁도(五服沿革圖), 심의제도(深衣制度)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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