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5년(공민왕 14) 문과에 급제, 감찰규정으로
신돈(辛旽)의 비행을 공박하다가 지영주사로 좌천되고
1371년 안렴사
김주(金湊)가 그의 치적을 제1로 보고하여 고공좌랑에 올랐다. 그후
여러 벼슬을 거쳐 첨서밀직사사가 되었다. 1392년 조선개국
후 경 기도 도관찰사가 되어 계룡산 천도를 반대, 한양천도를 적극 주장했고,
다음해 첨서중추원사 로 전임, 명나라 태조가 표전물이 불손하다는 이유로
문책하자 1396년(태조 5) 한성부윤으로 계품사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표전문 작성의 전말을 보고함으로써 해명에 성공했다. 1398년
충청도 도관찰사로서 제1차 왕자의난 때 이방원(태종)을 도와 공을 세우고 정당문학에
승진, 정사공 신 1등으로 진산군에 봉해졌다.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때도 방원을 도왔고, 이어 판의홍삼군부사를거쳐 우의정에
되어 진산백으로 진봉, 이해 태종이 즉위하자 좌명공신1 등에 책록,
다음해 관직을 사임했다. 1402년 좌정승이 되어 판승추부사를
겸임, 이해 등극사로 명 나라에 다녀왔다. 1409년 영의정부사가
되어 군정을 개정했고, 영춘추관사로 "태조실록(太 祖實錄)"의 편찬을
지휘했다. 1412년 다시 좌의정을 지내고 1416년 치사, 진산부원군에
진 봉죄더 왕명으로 함길도에 있는 선왕의 능침을 순심했다.
시문에
능했고 음양·의술·성경 ·지리에도 정통했다.
태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호정집(浩亭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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